1535년 왕이 송도에 행차했을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宿衛)에 임하다 죽었다. 성품이 파당을 싫어하고 꾸밈을 좋아하지 않고 음주를 즐기며 학문에 밝아 이행, 정희량(鄭希良), 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는 특히 역학·음양과 복서(卜筮)에 통달했다고 한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과천에 그의 별장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유과천별서(遊果川別墅)」 등 총 6수의 시가 전한다.

참고문헌 : 『燕山君日記』 ; 『中宗實錄』 ; 『國朝人物考』 ; 『國朝文科榜目』 ; 『虛白堂集』 ; 『燃藜室記述』

김정희(金正喜) 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백여 가지나 된다. 출신지는 예산이다.
조선 왕조의 훈척가문(勳戚家門) 중 하나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과 기계 유씨(杞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노영(魯永) 앞으로 출계했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이어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해 올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예조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연루돼 고금도에 유배되었지만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오긴 했지만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므로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 생을 마쳤다.
1권>3편>3장>2절>490면